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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다투고 나서 방에 각자 틀어박혀 있던 순간을 떠올려보세요.

한참 뒤에 상대가 문을 열고 "미안해"라고 말하면, 이상하게도 마음이 곧바로 풀리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오히려 "근데 너도 그때 왜 그랬어"로 이어질까 봐 긴장부터 됩니다.

그런데 누군가 "라면 끓여줄까" 하고 물으면, 별다른 말도 안 했는데 어깨에 힘이 스르르 풀리는 경험.

사과의 말보다 밥 한 끼 제안이 먼저 마음을 열게 만드는 순간이 분명 있습니다.

말은 다시 시비를 가릴 위험을 안고 있다

사과의 말이 힘이 없는 건 아닙니다.

다만 싸움 직후엔 몸이 아직 긴장 상태에 머물러 있어서, 말 한마디도 다시 판단하고 방어하게 만들기 쉽습니다.

"미안해"라는 말조차 "근데 누가 먼저 그랬는데" 하는 생각을 함께 끌고 올 수 있습니다.

긍정 정서에 관한 연구에서는 부정적인 감정으로 높아진 심혈관 반응이,

긍정적인 정서를 경험한 뒤 더 빠르게 회복될 수 있다는 결과가 보고됐습니다.

이 연구가 "싸운 뒤 음식을 먹으면 화해가 빨라진다"는 것을 직접 보여준 것은 아니지만,

 

갈등 뒤 남은 긴장을 낮추는 데 작은 긍정적 경험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는 생각해 볼 여지를 줍니다.

말로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 몸의 긴장부터 풀어주는 쪽이 먼저 움직일 자리가 있는 셈입니다.

그래서 "미안해"보다 "뭐 먹을래"가 더 빨리 마음을 여는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있는 겁니다.

사과가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니라, 몸이 아직 긴장해 있는

그 타이밍엔 말보다 행동이 먼저 들어갈 자리가 있을 수 있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사과와 음식은 서로 다른 질문에 답한다

사회적 식사에 관한 연구에서는 함께 음식을 먹는 행동이 사람 사이의 사회적 유대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누군가와 다시 밥을 먹는 행동을, 단순히 '음식을 먹는 것' 이상의 사회적 신호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같이 먹자"는 말이 곧 "화해하자"는 뜻이라는 건 아닙니다.

다만 싸운 뒤에도 함께 무언가를 하자는 제안 자체가, 관계를 완전히 끊지는 않았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질 수는 있습니다.

말로 하는 화해와 다른 점이 여기 있습니다.

 

사과는 주로 '무엇이 잘못됐는가'에 답하는 행동이고, 같이 무언가를 먹자는 제안은

'그래도 우리 관계를 이어가고 싶은가'에 더 가까운 신호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사과는 갈등의 내용에 접근하고, 함께 먹는 행동은 관계 자체에 접근하는 셈입니다.

사람에 따라 두 질문 중 어느 쪽에 먼저 답을 듣고 싶은지가 다를 수 있습니다.

잘잘못을 분명히 하고 싶은 순간엔 사과가 먼저 필요하고,

관계가 여전한지부터 확인하고 싶은 순간엔 음식 제안이 먼저 와닿을 수 있습니다.

사과보다 먼저, 낮은 부담의 행동부터

싸움 직후 상대가 아직 방어적인 태도를 보인다면, 그게 바로 말보다 행동을 먼저 꺼낼 신호입니다.

"얘기 좀 하자"는 제안은 다시 논쟁을 여는 문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라면 끓여줄까" 같은 제안은 대답하기에 부담이 훨씬 적습니다.

거절하기도 쉽고, 받아들이기도 쉽습니다.

오늘 당장 써볼 수 있는 방법은 이렇습니다.

싸운 직후 바로 사과나 대화를 시도하는 대신, 먼저 아주 작고 부담 없는 행동 하나를 건네보세요.

물 한 잔, 간단한 야식, 좋아하는 간식 같은 것들입니다.

 

그 행동을 받아들이는 순간부터 대화의 문이 조금씩 열립니다.

만약 그 제안마저 거절한다면, 아직 대화할 준비가 안 됐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그때는 억지로 밀어붙이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그리고 정말 사과해야 할 일이 있다면, 행동으로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는 것과 별개로 적절한 순간에 분명하게 사과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음식이 사과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 관찰자의 생각

저는 이 순서가 사과를 건너뛰어도 된다는 뜻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마음이 풀리는 데는 순서가 있고, 그 순서를 건너뛴 사과는 오히려 겉돌 수 있습니다.

몸이 아직 방어 태세인 사람에게는,

옳고 그름을 짚는 말보다 관계가 여전하다는 걸 보여주는 작은 행동이 먼저 필요한 겁니다.

라면 한 그릇, 과자 한 봉지가 싸움을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기 어려운 순간에 "같이 뭐라도 먹을래?"라고 건네는 작은 행동은,

적어도 우리가 아직 서로에게 등을 돌리고 있지만은 않다는 신호가 될 수 있습니다.

어쩌면 화해는 누가 먼저 "미안해"라고 말하느냐에서 시작되는 게 아니라,

다시 같은 자리에 앉을 수 있느냐에서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출처

  • Fredrickson, B. L., & Levenson, R. W. (1998). Positive emotions speed recovery from the cardiovascular sequelae of negative emotions. Cognition & Emotion, 12(2), 191–220.
  • Dunbar, R. I. M. (2017). Breaking bread: the functions of social eating. Adaptive Human Behavior and Physiology.
  • 갈등 이후의 신체적·사회적 접촉이 부정적인 기분의 완화와 관련될 수 있다는 연구도 보조적으로 참고: Murphy, M. L. M., Janicki-Deverts, D., & Cohen, S. (2018). Receiving a hug is associated with the attenuation of negative mood that occurs on days with interpersonal conflict. PLOS O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