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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하고 집에 들어오면 가방을 내려놓기도 전에 발이 먼저 부엌으로 향할 때가 있습니다.
딱히 먹고 싶은 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저녁을 방금 먹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냉장고 문을 열고 그 앞에 서서 한참을 들여다봅니다.
계란, 반찬통, 반쯤 남은 우유. 딱히 눈에 들어오는 것도 없이 그렇게 서 있다가 문을 닫습니다.
손에 든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생각합니다. 방금 나 뭘 한 거지.??
배고픔보다 먼저 행동을 시작시키는 것이 있다
우리는 이 행동을 습관처럼 배고픔 탓으로 돌립니다.
하지만 배고프지 않은 상태에서도 이 행동은 똑같이 일어납니다.
한 연구팀은 영화관에서 이 지점을 실험했습니다.
평소 영화 볼 때 팝콘을 습관적으로 먹던 사람들에게 일부러 눅눅해진 팝콘을 나눠줬습니다.
맛없다는 걸 알면서도, 습관이 강한 사람들은 신선한 팝콘과 거의 비슷한 양을 먹었습니다.
그렇다고 배고픔이 아무 상관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배고픈 사람들이 전반적으로 조금 더 먹는 경향은 있었습니다.
다만 습관이 강하게 굳은 사람들에게는, 그 순간의 배고픔이나 맛에 대한 선호가 행동을 충분히 바꾸지 못했습니다.
습관이 강할수록 몸은 지금 배가 고픈지, 이게 맛있는지를 굳이 확인하지 않고 그냥 손을 움직인 겁니다.
그런데 장소가 바뀌자 습관이 흔들렸다
여기서 흥미로운 지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연구팀은 영화관이 아닌 낯선 회의실에서, 이번엔 다른 참가자들을 대상으로 같은 실험을 다시 해봤습니다.
그러자 습관이 강했던 사람들도 눅눅한 팝콘을 확실히 덜 먹었습니다.
영화관에서는 사라졌던 '맛없으면 안 먹는다'는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 장소만 바뀌었을 뿐인데 다시 돌아온 겁니다.
이건 그 행동이 몸 안에 고정된 성격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몸에 새겨졌다기보다, 그 시간과 장소를 만나면 행동이 먼저 떠오르도록 연결되어 있는 것에 가깝습니다.
냉장고 앞에 서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퇴근 후 집이라는 상황 자체가 그 행동을 불러내는 자리이고,
만약 그 자리 자체가 사라진다면 행동도 함께 약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실제로 집을 옮기거나 생활환경이 크게 달라지면 기존 습관이 약해지는 경우들이 보고됩니다.
습관은 나 혼자만의 성향이 아니라, 그 행동을 반복하게 만든 환경과 함께 존재하는 셈입니다.
신호를 건드려야 행동이 바뀐다
그렇다면 냉장고 앞에 자주 서는 건 의지가 약해서일까요.
꼭 그렇게 볼 필요는 없습니다.
무작정 참으려고 하는 것만으로는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습관이 강할수록, 참는 것보다는 그 행동을 시작하게 만드는 신호 자체를 건드리는 편이 더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같은 연구에서 사람들에게 평소 쓰지 않는 손으로 팝콘을 먹게 하자,
습관이 강한 사람들도 눅눅한 팝콘을 덜 먹었습니다.
손이 낯설어지자 자동으로 이어지던 행동이 잠깐 방해받은 겁니다.
집에 들어와서 바로 부엌으로 가는 동선을 한 번 바꿔보는 것도 비슷한 원리입니다.
가방을 먼저 내려놓거나, 손을 먼저 씻거나.
그 작은 낯섦이 자동으로 흘러가던 발걸음에 짧은 정지를 만들어 줍니다.
그래도 손이 먼저 나간다면 자책할 일은 아닙니다.
그 순간을 알아차렸다는 것 자체가, 이미 자동 반응과 나 사이에 작은 틈을 만든 것이니까요.
사람 관찰자의 생각
저는 이 행동이 의지박약의 증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몸이 아주 부지런히 일하고 있다는 증거에 가깝습니다.
매번 새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건 피곤한 일이라, 몸은 자주 반복되는 상황을 아예 자동으로 넘겨버립니다.
냉장고 앞에서 멍해지는 순간은, 그게 잠깐 겉으로 드러난 순간일 뿐입니다.
재미있는 건, 배고픔이라는 가장 명확해 보이는 신호조차 습관 앞에서는 힘을 잃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몸의 소리를 그대로 따른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몸보다 상황과 자리가 먼저 움직임을 결정할 때가 많습니다.
냉장고 문 앞에서 잠깐 멈춰 서서 "나 지금 뭘 원하는 거지"라고 스스로에게 묻는 그 몇 초가,
어쩌면 하루 중 가장 정직하게 나를 들여다보는 순간일지도 모릅니다.
출처
- Neal, D. T., Wood, W., Wu, M., & Kurlander, D. (2011). The Pull of the Past: When Do Habits Persist Despite Conflict With Motives?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Bulletin, 37(11), 1428–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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